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 새해 들어 처음 읽은 책이다. 순전히 인터넷에서 본 '나는 별일없이 산다'라는 글 때문에 끌려서 몇개월전에 샀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읽었다. 냉소적이고 잘난척하는 듯한 이미지인데다가, 나는 쉽게 읽히는 글을 좋아하는데 이 사람의 문장은 그런쪽은 아니어서 사실 그동안 썩 호감이 가진 않았었다. 그래도 글을 읽어보면 이 사람의 가치관이랄까 세계관이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공감이 가기 때문에 앞으로도 어느 정도는 관심을 유지하게 될 것 같다.
- 이 책에는 최근 몇년간 허지웅이 신문, 잡지 등에 연재했던 글과 개인적으로 썼던 글들이 실려있다. 영화에 대한 감상도 있고, 고시원 생활이라든가 가족과 얽힌 개인사도 의외로 솔직하게 풀어놓았다. 시사 논평도 제법 있는데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말에 대하여' '한국의 닌텐도라는 이름의 욕망' '마이클 잭슨,괴물과 우상' 등이 특히 흥미로웠다.
- 기억에 남는 대목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의 선량함이나 역량에 의존하는 방식보다는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체계가 중요하다'는 부분이 제일 공감됐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서 원인을 찾고 대책을 마련해봤자 세상은 그렇게 계속 굴러갈 뿐이다. 허지웅 말대로, 배를 곯으면서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챔피언이 된 운동선수를 단지 영웅으로 기억할게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게 만든 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볼 일이다. 갖출 수 있는 스펙은 모두 다 갖춘 인재를 원하면서도 정작 열정페이 운운하는 세상에서, 청년실업 문제를 개인의 마음가짐이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처럼 말하는 건 청춘에 대한 모욕이다.
- 때로는 비상식적인 것에 맞서는 것만으로도 그 과정에 상관없이 정의로운 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기가 선하다고 해서 모든 결과물이 옳고 훌륭한 것은 아니다. 또 사람들이 '선하다'고 믿는 것에 의문을 갖고 비판한다고 해서 그게 꼭 악한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진정성,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절대악 취급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담함을 느낀다. 정말로 비상식적인 것에 맞서고 싶다면 그것에 내재되어있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이나 불합리함을 발견하고, 그와 똑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미 내 모습이 그런듯해 씁쓸하다. 작년 4월 세월호 사고 때 신문과 방송에 도배된 아이들의 소식에 몇날며칠을 마음 아파하며 눈물 흘렸지만, 며칠 전 인터넷에서 단원고 아이들의 빈 책상 사진을 볼 때까지 내가 그 일에 대해 몇 번이나 더 깊이 생각했었나? 슬퍼하기는 쉽지만 기억하며 살기는 참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상 돌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